최초의 3분(The First Three Minutes) - Steven Weinberg

이 지구 사회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보면서, 신비로움과 겸허함과 같은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지구 저 너머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조상을 찾고 거슬러 올라가, 생물과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이 책은 이 세상이 탄생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 우주탄생의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약작용과 전자기적 상호작용에 대한 통일적 모형을 제시하여, 197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로서, 이 책을 통해, 초기 우주론이 입자물리학의 주요 주제로 부상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우주 영화의 배경은 태초에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은 공간에서 빅뱅(Big Bang)이라는 대폭발로부터 팽창하는 공간이고 주 배우는 몇 가지 힘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몇 scene에서 어떤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질 것인지는 급격한 온도 하강 시점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힘이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우주의 최초의 3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 책은 이 물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어낸 전설이나 우화가 아닌 과학적인 계산의 결과로서 그려지는 일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처음 1, 1, 1년의 마지막 순간에 우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선뜻 믿기지 않을 수 있다. 뉴트리노 마저도 열 평형 상태에 있었던 순간부터 헬륨 핵 합성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의 빅뱅 이후 최초의 3분을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의 지식으로 그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그 진실을 얘기해줄지는 불확실하지만, 그 예측에 대한 가능성만큼은 탐구를 할 수록 높아져 간다.

 

사실,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우주론과 입자물리학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현상을 추론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기존의 일반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고전역학에서, 새로운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이를 만족할 만한 이론을 제시하려는 현대물리학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실험 아이디어를 제공 받기도 하고, 이론과 실험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현대 우주론은 20세기 초엽에 시작되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망원경과 레이더 같은 관측 장비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우주 배경복사 같은 현상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 현상으로 인해 허블의 우주팽창론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우주로 갈 수록 현재의 우주보다 점점 더 작아지고 물질은 밀집된 상태로서, 더 뜨겁고 고압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빅뱅우주론은 1920년대 허블에 의해 관찰된 우주의 팽창, 1965년 펜지아스와 윌슨에 의해 발견된 우주배경복사, 우주의 수소, 헬륨 등의 가벼운 원소의 분포가 그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최초의 3분은 이 원소들의 비율이 결정된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다. 와인버그는 물질세계의 기반이 이루어지는 최초 3분의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우주의 팽창과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을 통해 빅뱅우주론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먼저 설명한다. 또한, 급격히 팽창하는 초기 우주의 변모를 따라가다 보면 복사가 우세한 우주에서 물질이 우세한 우주로 바뀐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이 설명 방식은 사건의 원인 결과를 명료하게 짚을 수 있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와인버그는 과학적인 연구 접근 방법에 대해서도 지적을 했다. 6장에서 우주 초단파 배경복사의 검출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이전에는 이 복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없었던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이 세가지 이유 중에 한가지는 실험가와 이론가들 사이의 교신에 파국이 일어난 점을 들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등방성 배경 복사가 검출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정보 소통이 좋지 않아서, 실험가들도 오해를 하게 되었다. , 제시되는 이론에 따라, 실험이 검증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셈인데, 지금은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의 발달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점에서 정보의 불균형은 크게 줄어들었다고 본다.

 

와인버그가 말한 제일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이 당시, 초기우주의 이론들을 심각하게 취급하기가 물리학자들에게는 비범하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본다. 최초의 3분은 우리와 시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온도와 밀도의 조건들이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통상의 통계역학과 핵물리학을 적용하는 데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물리학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가 어떠한 이론을 내세웠지만, 정작 자신은 그 이론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 시간이 흘러 다른 학자가 새로운 개념을 주창하는 식으로, 물리학의 역사는 변혁되고 발전하게 된다. 와인버그 역시, 이에 대하여 지적한 바로는 우리의 과오는 우리가 이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의 많은 연구 과제에서도 한번쯤은 곱씹어 생각해볼 지적이다. 그리고, 학계의 흐름에 따라 대세가 되는 물리학적 연구 주제가 정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주제에만 집중하여, 다른 현상들은 그러한 노력을 들이기에는 적합한 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도 존재한다. 현재, 대학교 내의 연구부서도 각광 받는 분야에 따라, 그에 할당되는 예산과 연구원의 수가 다르듯이 현대의 과학 연구 시스템에 어느 정도의 장단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1965년에 3K 배경복사의 발견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공로는 우리 모두에게 초기우주가 있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느낀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론들이 서적에 일목묘연 하게 정리가 되어 우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쉽게 습득을 하지만, 그 이론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새롭게 이론을 만들고 입증해보는 작업을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기에, 이 일이 생소해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와인버그는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해하지 않고 과학의 성공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내가 물리학을 공부했던 접근방법이 많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흥미를 느낀 것은, 왜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된 것처럼 우주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른 것일까이다. 전자, 양전자, 뉴트리노, 광자는 미리 정해졌던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과정 사이의 평형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미량 포함되어 있었던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현재의 우주에서 원자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10분의 1초 후에는 300억도가 되었으며, 최초 3분간의 마지막에는 10억 도에 이르러 충분히 우주가 냉각되어, 양성자와 중성자로 된 중수소의 핵을 비롯해 복잡한 핵들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구성방식에 대하여 왜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핵물리학과 여러 우주 원리들을 제창하고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훨씬 뒤에 수십만 년 후에는, 전자와 핵이 결합해서 수소와 헬륨의 원자를 이루기에 충분하도록 식어서 중력으로 덩어리를 이루어 현재 우주의 은하와 별들을 형성했다. 정말 이 과정들을 차근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비롭다. 결국은, 나를 이루는 물질의 근원이 바로 최초 3분 동안에 마련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옳고 그름을 진정하게 확신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와인버그가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이론적 편견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론적 편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론적 편견의 옳고 그름은 그것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다. 이는 과학이 현 세대에 있어서 왜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농축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태초에 대한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에 밀접하게 닿아 있고, 현재까지도 많은 종교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최초' 이전은 대체 무엇일지, 이렇게 우연히라고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과정들을 과연 신이 만들고 계획한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와인버그 역시 8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한다.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우주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든 태초부터 언젠가 태어나도록 되어 있었다는 믿음을 인간이 갖게 되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듯하다. 이렇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든, 그 반대든 이 생각의 기로에서부터 과학은 큰 힘을 발휘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신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많은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우리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한다. 사실, 이 우주를 점점 이해하면 할수록, 그만큼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내가 아마존의 한 원주민으로 태어나 그 부족의 잣대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 세상과 우주는 변치 않는다. 하지만, 개중에는 '왜 그럴까?'라는 의문 하나만으로 우주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을 쏟아 놓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그런 제안 중에 가장 정직하고 논리 정연한 과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대 물리학은 복잡한 물리적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급 수학을 곁들어 정리하다 보니, 수학적인 계산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물리적 현상들은 직접 자연의 본질적인 단순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초기에도 미래에도, 거시세계에서도 미시세계에서도, 비슷한 단순성을 보여줄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거기에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이 없는 이상.

그래도, 최초의 3분을 통해,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이 우주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이 인간이 탄생하도록 진행된 방향은 137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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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실

모든 것을 무한히 의심하며 독단을 거부하는 과학의 논리와 방법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자세. 이것은 물리학자 파인만이 우리에게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5) 우리는 이 유산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설령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기술이 점차 발달되고 우리가 기술의 노예가 된다는 테크노폴리 시대의 도래를 닐 포스트먼이 지적했듯이 (닐 포스트먼, 김균 역, 『테크노폴리』, 서울-민음사, 2001, p.22) 현대사회의 과학문화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학문화란 과학에 대한 관점과 사회, 기술 등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인터넷, 휴대폰 등으로 인간관계의 틀까지 재정의 되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점도 있겠지만, 나쁜 점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로 인간성 퇴색을 문제로 삼는 닐 포스트먼 같은 사람도 있다. 물론, 과학만능주의라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큰일 나는 법’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꿰뚫어 보듯이, 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사회적 풍조를 견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학자체가 문제일까, 과학만능주의를 일삼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답은 둘 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제3자에 있다.


적어도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닐 포스트먼처럼 종교와 역사를 통한 합리화로 인간성 회복이라는 구차한 방식까지 갈 필요는 없다. 즉,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 사회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가치를 파생시킬 여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과학문화란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녀야 할지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세계관은 바로 보편성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과학은 그것의 지위를 서서히 하락시켰다. 지위를 하락시켰다는 의미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재고해서 생각해 볼 터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의 역사대로 따져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된 인간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고, 태양 역시 수많은 별 중에 하나일 뿐이고, 은하에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위상이 떨어지고만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슬로건으로 신을 찬양하게 만드는 교회 집단이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브루노의 화형과 갈릴레이의 탄압 같은 사상의 통제로 자유를 빼앗았다. 하지만,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의 역사적 위상이 일련의 진화적 결과라는 주장 같은 여러 신빙성 있는 결과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음으로써, 결국 과학은 승리했다.


과학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과 솔직함이다. 과학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이 객관적인 결과물도 과학자들은 절대 확신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그것을 의심하고 모든 진술은 확실성의 정도가 다른 근사적인 진술임을 인식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파인만의 생각을 가져오는 것이 옳을 듯하다. 파인만은 어느 문제이든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확실성을 찾지만,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즉, 우리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계속적인 의심을 통한 진보가 과학 발전에 절대 불가결한 원칙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46) 즉, 이렇게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이 사회가 더욱 정직하고 솔직해지는 것이다.


사회에 있어서, 이런 과학의 보편성과 정직함과 솔직함이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한 예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인을 국가가 통제하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에 대해 항의했고, 독일 아카데미로부터 탈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나치즘이 태동하기 직전, 독일의 그 음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과학인들마저 변질된 모습과 지식인들의 광기 안에서 나치즘의 발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Albert Einstein, 정진우 역,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서울-세시, 2005, p.260) 이와 같은 예로, 단지 과학을 하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돋보인다고 단정 지으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끔찍한 비도덕적 광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하려는 바는 과학의 이런 특성들이 도덕적인 구심점을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 또한 도덕적인 규칙을 제공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의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인생에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단적인 해답은 다른 해답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의 교리에 맞는 해답만이 우월하다는 생각 또한 큰 분쟁을 유발시킬 수 있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는 것은 솔직히 인정을 해야만 우리는 열린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일찍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든 사람들을 인도한 철학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방법은 18세기 말에 과학이 성공적인 모험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잠재 가능성을 활짝 펼친다는 것은 하나의 기회이며, 의심과 토론이 미지를 향한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도 명백해 보였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61)


과학이 이런 좋은 일만 한다는 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논의대상이 생기는 부분은 거의 모두가 과학의 응용과 관련되어진다. 나아가서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제도 대개 응용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과학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과학은 이 힘을 어떻게 써야하고 어디에 써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그 힘의 용도를 결정하고 응용하므로 전적으로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기를 처음 발견한 갈바니와 볼타는 후세의 전자기술에 대하여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뒷날에 이루어진 그의 발견의 실제적 이용에서 오는 이익이나 위험에 대한 책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발견을 통해 얻어진 지식으로 실제적으로 응용을 하는 과학자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컨대, 전화의 발명자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모든 연락을 좀 더 빨리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 화약의 발명자도 자기 나라의 전투력을 강화시키기를 바랐던 호전적인 권력의 위임 아래에서 연구에 종사한 사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300)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과학에 외부 권력과 생각이 침투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인 가치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물리학자 오토 한은 원자핵 분열을 발견했고, 그것을 다른 과학자들은 실제적으로 원자폭탄의 제조에 응용을 했다. 물론, 그 과학자들 각각의 사상과 생각이 지향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고 싶어 하던 전쟁지도층 아래에서 그 일을 수행한 것은 거기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물론, 여기에는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에 따른 문제가 있다. 미국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에 따른 히틀러의 승리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 미국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 무기의 사용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겠지만, 그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늦었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p.301~302) 결국, 그들의 책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어 과학 자체로 모든 시각을 돌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이다. 과학의 가치를 도외시하고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잘못을 따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 과학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사항은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과학 지식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여러 문제의 근원을 삼아야 한다.


극단적인 혹자는 과학을 하지 말고 문제의 씨조차 발생시키지 말자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현재,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을 무시하는 처세이며 상상력을 억압하는 생각이다. 즉, 인간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는 과학이 적용되는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불확실성의 정도를 줄여감으로써 새로운 해결 방향의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과학만능주의라는 것도 과학과 그것의 한계를 정확히 안다면 그리 나쁠 것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또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의 과학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방대한 스케일의 우주를 설명해주는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원자와 소립자 세계를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Brian R. Greene, 박병철 역, 『엘러건트 유니버스』, 서울-승산, 2003, p.21) 이렇게 설명한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는 뜻이 아니다. 완벽한 이해에 접근할 뿐 거기에 따른 불확실한 요소도 많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불확실한 요소를 확실하게 바꾸기 위한 정직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과학의 역할을 정확히 앎으로써,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과학문화의 입지를 굳건히 해야 한다.


과학의 시각을 재고하고 과학을 이용하는 인간에 도덕적인 덕목이 우선시된다면, 과학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바람직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사람과의 정직성과 솔직함이 사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부추기고,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올바른 과학문화를 양성함으로써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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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변천

2008. 3. 12. 00:50

- 소리의 변천 -

  우리들은 일상생활 중에 24시간 항상 소리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의 이야기 소리, 웃고 떠드는 텔레비전 소리, 시끄러운 자동차소리 등 온갖 잡다한 소리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그런 소리들을 본능적으로 구별할 수 있고, 심지어 소리의 적절한 조합을 통해 여러 스타일의 음악을 창출해낼 수도 있다. 팝, 록, 뉴에이지 등 여러 장르로 분화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음악 앨범이 매일같이 쏟아져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현재, 더 나아가 실생활에 직접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우리가 아는 소리의 정체성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미래엔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과거에 진행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유추하는 것이 어떠할련지. 그리하여 먼 옛날, 인간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 출발해보자. 현재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이 말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8만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원시인들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은 약 60만 년 전부터라 하니 놀라운 일이다. 물론 노래라는 것이 아,오,우 따위의 단모음 소리를 고저, 장단, 억양을 붙여 일종의 신호음을 만든 정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시인들은 벼락, 폭포, 야생동물의 으르렁 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주변에서 나는 이 모든 소리들에 매우 민감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냥꾼은 자신이 애용하는 활시위를 잡아당길 때, 마치 손으로 뜯는 듯한 묘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듣게 된다. 화살 부는 통으로 짐승을 잡기 위해 독화살을 불어 날릴 때에도 그는 또한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인간들은 주위 환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진동과 공명 같은 소리의 원리를 차츰 깨우쳐갔다. 이런 본능적으로 쌓아온 경험을 통해 얻은 일종의 과학 지식을 가지게 되니 소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욕망이 악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처음 악기는 간단했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 나무와 엮어 북을 만들어 위급한 신호나 흥겨운 축제에 리듬을 붙여주는 의도로 주로 사용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은 악기를 저 세상과 교류하는 도구로 여겼으며 때로는 그 악기 앞에 음식을 공양하거나 희생 재물을 드리기도 하였다. 사회가 만들어지고 악기가 차츰 발달하면서 금속 악기나 청동 악기들이 탄생했고 이 악기들을 통해 만들어낸 음악은 곧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가축 떼를 지키며 심심해하던 목동은 작은 피리를 부르며 즐거워했고 종교 행렬이나 장례식, 운동회, 전쟁의 승리 후의 개선식 등 여러 행사에 있어서 음악은 항상 함께 했다.


 ‘우리 귀에 들리는 음악에는 어떠한 규칙이 보이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 이런 생각에 따라 음에 대해서 최초로 분석하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수는 만물을 지배 한다’라고 말한 피타고라스였다. 길이가 다른 두 줄을 튕길 때, 그 두 줄의 길이의 비가 간단한 분수로 표현될 때 듣기 좋은 화음이 생성된다는 주장이었는데, 줄의 길이가 2:3이면 이 간격을 ‘완전 5도’라 하여 듣기에 가장 편안한 화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피타고라스의 발견은 기하학이 아닌 수를 기본으로 하는 규칙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밝힌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소리와 숫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의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실험적인 발견을 물리적인 결과로 결부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즉, ‘왜 그런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면 물리학은 훨씬 더 이른 시기에 태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현대 과학이 말해주는 개괄적인 답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우리가 현재 듣는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음악적인 음조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의 귀에 들리는 소리 중에는 소위 잡음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공기압의 변화가 불규칙적이라서 귀의 고막을 불규칙적으로 진동시킴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대로 아름다운 음악의 음조의 특징은 잡음과 달리 공기압의 변화가 주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음악가들은 이 반복되는 패턴의 구체적인 형태를 ‘음색’이라는 특성으로 표현하고, 공기의 압력이 변하는 정도인 ‘크기’와 압력의 변화가 반복되는 주기인 ‘높이(고저)’로 이 세 가지의 특성의 조합으로 모든 음악의 음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20세기에 들어서 음을 전기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기에 완벽히 정리된 것인데도, 옛 시대의 많은 음악가와 악기의 탄생과 세계 곳곳의 고유한 문화적 감성의 노래가 이어지고 발달한 것은 과학적인 분석보다 경험에 의한 의식적인 분석이 소리에 대한 관점에 좀 더 확실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바흐의 유명한 ‘G선상의 아리아’를 들어보라. 지금 들어도 아름답지 않은가? 피타고라스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러 ‘음악학’이라는 별도의 학문이 생겨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오랫동안 인간은 소리의 과학을 의식적으로 터득하여 전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식으로 공기의 흐름을 막으면 어떠한 소리가 나고 새로운 울림이 나는지 선조들은 이해했고, 현대에 들어서 선조의 여러 지식을 발판삼아 우리는 좀 더 형식적이고 과학적으로 소리를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전기제품의 소리를 발생, 전파, 수신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 소리를 실질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소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넓혀야 했다.


 사실, 관점을 넓힌다 해도 소리를 바다의 파도가 전파되는 모습처럼 연상하면 그만이다. 물론 여기서 다른 점은 파의 진행방향과 파가 진행하는 공간인 매질의 입자가 진동하는 방향이 틀린 것인데, 파도의 경우, 파의 진행방향과 매질 입자의 진동방향이 수직이면서 평행한 반면, 소리는 그 방향이 반드시 평행하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손바닥만 한 용수철로 이해할 수 있다. 용수철을 원기둥이 되게 세운 상태에서 양끝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보자. 이 때, 그 용수철을 바라보면 얼룩말처럼 검은 줄무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용수철이라는 매질이 압축된 부분이다. 이렇게 압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파가 전파되는 모양을 본떠서, 공기가 진동하면서 전파되는 것이 우리가 듣는 소리가 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임의의 물체가 움직일 때, 그 주위의 공기를 교란시켜 압력을 변화시키게 된다. 물론 물체의 속도가 느리면 공기는 물체의 주변을 흘러갈 뿐이겠지만, 물체가 충분히 빠르게 움직인다면 공기가 물체의 주변을 조용히 흘러갈 정도로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움직이는 물체에 의해 공기가 압축되고 압축된 공기가 다른 공기를 밀어내며, 밀린 공기는 다시 압축되어 또 다른 공기를 밀어내는 식으로 일종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음파(소리)가 전달되는 원리라 할 수 있겠다. 다시 앞의 용수철을 더욱 빠르게 흔들어보자. 내 팔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 만큼 용수철에는 더 많이 줄무늬가 생기는 것이 보인다. 우리가 몸의 명칭을 붙이듯 여기서도 명칭을 붙여보자. 줄무늬 사이 간격을 파장이라고 하고 파장을 한 번 통과한 시간을 주기라 하자. 그리고 여기서 주기의 역수는 1초에 통과한 파장의 개수가 될 것이고 이를 주파수 또는 진동수라 이름 붙이자. 이름 붙이는 것이 아직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듯하지만 과학은 이렇게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돌아와서 용수철을 빠르게 흔듦으로써 유추해본 가운데 용수철에 에너지를 많이 가할수록 줄무늬가 많이 생겨 파장이 짧아지고 주파수가 높아진다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에 살펴봤듯이 압력의 변화가 반복되는 주기의 역수인 이 주파수에 따라서 소리의 높낮이가 결정된다. 즉, 주파수가 높을수록 사람은 높은 고저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타를 칠 때, 줄의 길이를 점점 짧게 하여 튕길수록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짧은 소리를 낸다. 여기서 우리가 튕길 줄의 길이를 앞에서 말한 파장이라 생각한다면 파장이 짧을수록 높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주파수와 소리의 높낮이는 비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주파수는 전기가 생활화되면서 많이 활용되는 명칭이다. 인간의 목소리를 주파수로 따져보면 약 100~5000Hz 정도인데 이것을 전기적 신호로 바꾼 후 전송하여 다시 음성 신호로 바꾼다면 우리가 쓰는 간단한 전화의 원리가 된다. 이런 간단한 원리로부터 라디오, 텔레비전 같이 응용되어 집 안에서도 생생한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으니, 우리는 소리를 바라본 관점을 잠시 바꾼 것만으로 집에 편히 앉아 소리를 공유 받을 수 있게 된 시절이 온 것이다.

 이렇게 소리와 전기가 피를 나눈 밀접한 관계가 성립된 배경으로는 전기의 여러 장점이 소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전기는 손쉽게 진동의 횟수를 변경할 수 있어서 능수능란하게 소리의 진동수를 재현할 수 있다. 요즘에는 신디사이저와 같이 전기적으로 음향을 합성하여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의 음색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해낼 수 있기까지 하다. 이것은 임의의 음색이 여러 가지 배음(정수배의 진동수에 의한 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아래에서 푸리에라는 수학자가 발견한 일종의 함수를 이용하면, 음색을 추출하거나 배음의 함량을 조절해 합성할 수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일상생활에서 대화를 나눌 때 소리를 다르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대화할 때 입의 모양은 입 안에 있는 공기의 진동 모드를 결정하는데 일부 모드는 목에서 나오는 소리에 의해 진동이 유발된다. 이 과정에 일부 배음의 세기가 다른 배음보다 커지게 되고, 입의 모양을 바꾸면 다른 진동수를 가진 배음이 우세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이다. 즉, 특정한 진동수가 강조되어 목소리를 높여도 같은 발음으로 들리게 되므로 우리들은 입모양의 조합으로 아름다운 음색을 자유롭게 흘러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화음은 아마도 이 배음의 진동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퉁겨진 줄의 처음에는 몇 개의 배음이 강하게 섞여있는데 줄의 길이가 2:3이면 짧은 줄의 두 번째 배음은 긴 줄의 세 번째 배음과 진동수가 같다. 즉, 그 음들의 진동수가 간단한 비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음을 눌렀을 때, 우리가 듣기에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이다. 사실, 이건 단지 개괄적인 답일 뿐, 왜 높은 배음들이 일치하면 듣기 좋은 소리가 나는지 현재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화음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귀가 이런 수학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적 감각을 느끼는 중추가 따로 있는 것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소리를 파동으로 대치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징은 더 많다. 동굴이나 지하실에서 소리를 내보면 울림이 일어나듯이 소리는 벽을 만나면 반사한다. 이 반사하는 특성을 정량적으로 다루어 응용하면 건축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꼭 복잡한 신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존하는 음악당 중에 음향이 가장 뛰어나다는 콘서트홀을 보면 놀랍게도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소리의 반사를 적절하게 이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 홀들은 전형적인 직사각형 평면에 직육면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형태는 천장이 높고 홀의 폭이 좁아서 측면의 벽을 통한 음의 강한 반사가 빠른 시간 내에 객석에 도달한다. 또, 공간이 충분히 커서 소리가 남아있는 잔향시간이 길어 한층 웅장한 느낌을 더한다. 그리고 홀의 천장을 보면 화려한 장식으로 울퉁불퉁하게 설계가 되어 있는데 이는 소리를 여러 공간에 골고루 확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재료 상으로도 이 홀들은 대부분 목재를 써서 반사할 때 전 주파수대에 걸쳐서 고른 음향을 걸러준다. 반면, 요즘의 많은 연주장의 모습은 공사비용의 문제로 공간을 최대한 작고 실내를 단순하게 만들며, 불에 타지 않는 인공재료를 사용한다. 이 재료는 특정한 주파수대의 음만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고른 음향을 들려줄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실질적인 건축음향학이 도입되기 전의 옛 음악당은 소리의 반사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도입된 후 보다 더 좋은 구조물이 된 셈이다.


 소리의 반사를 이용한 또 다른 경우는 없을까? 이를 살펴봄과 동시에 이제 소리는 확실히 변한다. 앞에 소리가 우리들에게 의사소통과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전도사였다면, 이제 소리는 수중탐험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았는가? 1912년에 가장 튼튼한 배라고 자신하던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부딪혀 무참히 침몰한 사건을 재현한 영화이다. 사실 소리가 직업을 전격적으로 바꾼 원인에 이 타이타닉호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약 물속에 빙산의 존재를 멀리서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참상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서 대두된 문제인 것이다. 빛과 같은 전자기파는 물속에서 단지 수 m의 짧은 거리만을 전파하면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거기다가 태양빛이 없는 밤중에는 설상가상이다. 무언가 새로운 전파 매개체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소리’가 낙점되었다. 역사적으로 선원들은 오래전부터 공기 중보다 밀도가 높은 수중 같은 액체에서 소리가 더 빨리 진행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 과학자들은 이 소리의 속도가 일정함을 알게 되어 유용한 수단임을 자각했다. 즉, 음파를 보내고 받는 기술을 발달시켜 기기들은 점점 더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소나{SONAR)라고 부르는 음향탐지기는 소리를 발생시키고 반사돼오는 소리를 통해 장애물을 식별하는 장치로서 타이타닉호와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했다. 한편, 수중에는 파도, 바람, 해양생물들에 의하여 많은 공기방울이 생기는데, 흥미롭게도 이 공기방울은 소리의 지위를 높이는 효과를 불러왔다. 공기방울들은 용수철과 같이 진동운동을 하는데 이로 인해 공기방울은 소리를 방출한다. 예를 들어, 반지름이 1mm정도 되는 공기방울의 경우 3kHz 이상의 수중 소음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집단 운동을 하면 실제 해양에서는 이보다 훨씬 낮은 수백Hz 대역의 소음이 주로 관측된다. 이것을 이용하면 어업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데, 물고기들이 움직이며 내뿜는 소리를 이용하여 어군의 밀도를 알아내고 어획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현재는 이런 것들을 영상화시키는 기술로까지 발전했다. 석유시추를 위한 해저면 상태나 바다의 여러 밀도의 오염 물질들을 정확히 영상화함으로써 해저환경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이렇게 소리는 여행하면서 우리에게 바다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바다에서 소리를 이용하는 것에 앞서서 이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선배가 있다면 믿어질까? 바다의 왕자 돌고래가 바로 그 분이다. 고래들은 오랜 수중생활을 통하여 시각기능과 후각기능이 퇴화한 반면, 소리를 감지하는 기능이 잘 발달돼 있다. 그래서 이 고래들은 음파를 사용하여 동료와 적을 구분하고 먹이의 위치를 찾는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발산하는 보통의 음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일명 ‘초음파’라 하여 보통의 음파보다 진동수가 높아 우리가 들을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약 20Hz~20000Hz 정도임에 반해 초음파는 진동수 20000Hz를 넘는 음파를 말한다. 진동수가 클수록 파장이 짧아 한 방향으로 집중하여 전파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 대상을 더 자세히 식별할 수 있으므로 수중 탐지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우리는 이제 돌고래로부터 소리의 새로운 매력을 배워간 것이다.


 초음파는 진동수가 크기 때문에 에너지가 크다. 용수철을 세게 흔들수록 주파수(진동수)가 커진다는 것으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 일상에 사용하는 초음파 세척기를 보면 이런 초음파의 큰 에너지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손으로 그릇을 깨끗이 닦는다 해도 미세한 알갱이가 곳곳에 숨어 있는데 이 그릇을 세척기에 넣으면 이런 숨은 알갱이들까지 깨끗이 해결된다. 이것은 초음파의 물질을 뒤흔드는 힘이 강하여 기포를 파괴해 화학적, 열적 작용을 이끌어 올림으로써 세척액의 화학반응과 분산반응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번에 것이 세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리였다면, 다음은 물체가 이상이 생겼음을 탐지하는 기술가로서의 역할을 소리는 충분히 실행한다.


 재료의 내부에 결함이 존재하면 그 재료는 본래의 강도를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된 제품도 사용하는 도중에 점차 약화되어 파손된다. 그리고 현재 생산되는 제품의 크기는 점차 소형화되는 추세로서 이러한 경우에는 매우 작은 결함일지라도 제품의 기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결함을 찾아야지 않겠는가? 제품을 직접 뜯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파괴하지 않고 결함을 찾아낼 방법, 그것이 바로 비파괴 검사이다. 특히, 초음파의 비파괴 검사는 X선이나 ϒ선과 같은 방사선의 투과시험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간단한 원리는 파원에서 발생된 초음파는 입자의 진동을 유발하면서 매질 내를 전파하고 그 전파 특성이 매질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이용한다. 즉, 초음파가 물체 표면에 도달하면 표면이 진동하게 되고 이 진동신호는 표면에 부착된 센서에서 검출된다. 따라서 수신되는 초음파신호를 적절히 분석함으로써, 재료의 보이지 않는 균열이나 구조적인 결함 같은 매질에 대한 여러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


 소리가 비파괴 검사에서 X선 같은 방사선과 같이 쓰였다면 이제는 이 소리만이 독창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분야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의료 분야의 활용이다. 초음파는 방사선인 X선이나 ϒ선과 달리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인체의 이상 유무를 비파괴 검사와 같이 자유롭게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초음파가 인체 내부로 전파되면서 인체조직의 물리적 특성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을 포착해 쉽게 인체 내부조직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이 달라지는 물리적 특성은 우리가 밝혀낸 파동의 온갖 성질을 지식으로서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니, 명칭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과학은 점차 지식을 쌓아가며 이렇게 새로운 과학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과학에 쓰인 파동의 성질을 살펴보며 현대의 과학으로 밝혀진 소리의 실체를 정리해보자.


 먼저 소리의 속도부터 시작한다. 앞에서 대기 중보다 수중에서 속도가 빠르다고 한 것처럼 소리의 속도는 매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즉, 물체가 단단할수록 속도는 커지는 것이다. 또, 온도에 따라 속도가 변하게 되는데 공기가 따뜻하면 분자들이 더 빠르게 움직이므로 음파가 전달되는 시간이 짧아진다. 이 매질의 밀도와 온도에 따른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인체조직내의 초음파 속도는 대기 중의 음파 속도에 비해 약 다섯 배 정도 빠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소리의 반사는 콘서트홀이나 수중음향탐지 그리고 비파괴 검사 등 안 쓰이는 곳이 없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인체 내의 어느 매질에서 입사하여 다른 매질의 경계면에 충돌하여 반사되는 파를 분석해보면 두 매질의 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예로서 종양과 같은 것은 주위의 매질의 밀도와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발견에 매우 유용하다. 앞에서 설명한 반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사면의 크기가 입사한 초음파의 파장에 비해 커야 하는데, 만약 반사면의 크기가 초음파의 파장과 비슷하거나 보다 작으면 많은 방향으로 산란된다. 이것은 계곡물 한가운데에 떠있는 큰 돌 주위의 흐르는 물의 모양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파 속에는 공기가 찬 작은 주머니가 있는데 여기에서 산란이 일어나므로 이 산란파를 이용하면 허파 속에 물이 차 있는지의 여부를 검사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종양과 같이 매질의 밀도가 다름을 이용하여 짐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초음파를 사용하기 위해 알아야 할 또 다른 사항으로는 굴절과 감쇠가 있다. 굴절은 초음파가 경계면에 반사되는 가운데 투과되어 다른 매질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진행방향이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즉, 물이 담긴 유리컵에 연필을 넣고 보면 경계면을 중심으로 굽어보이듯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의 현상이다. 어쨌든 이 굴절로 인해 우리가 보는 영상을 일그러지게 하므로 이것의 정확한 지식이 분명 필요하다. 또, 감쇠는 말 그대로 초음파가 조직 내를 진행할 때 열이나 반사, 산란 등이 증가함에 따라 초음파의 세기가 갈수록 감소하는 것을 말하는데 뼈나 허파에서 높은 감쇠율을 보이므로 조사를 할 때 큰 방해가 된다.


 이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컴퓨터와 연동하여 우리들은 안전하게 인체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진단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소리가 인간을 치료할 수단이 된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인데 더 나아가 이것이 이제는 어머니와 뱃속에 자라는 아기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청진기를 통해 아기의 살아 숨 쉬는 심장소리를 듣던 것이 이제 어머니는 화상으로 아기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낱 귀에 들릴 줄만 알았던 소리가 어머니 뱃속에 고이 잠자는 아기에게 사랑의 소리를 불어줄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장구한 세월동안 소리는 변해왔다. 원시인들의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로부터 듣고 즐기는 아름다운 음악의 소리, 인간에게 커다란 위용을 보여줄 바다의 소리, 그리고 아이와 엄마의 행복한 만남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소리는 과학을 만들었으며 과학은 소리를 만들었다. 또 어떠한 과학이 소리를 어떻게 변하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매질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던 소리는 이제 블랙홀에서 음파가 방출되는 것이 관측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원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소리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격동하는 소리의 변천 가운데에 끝까지 변하지 않을 소리가 있으니,

평화로운 새의 울음소리와 활기찬 인간의 웃음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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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 시간 참 빠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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