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른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 서른을 보는 나이. 나는 그동안 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여지가 없었다. 바빴다. 할 일이 많았다. 그만큼 많은 기회를 통해 성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의 방향이 맞는 길인가라는 의문은 지금 이 똑같은 장소와 계획된 일상에서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떠난다.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문화가 있는 다른 세상으로. 정처 없이 그 길을 헤매다 보면, 멈춰서 있는 사진과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를 조망해볼 수 있는 여유를 느끼면서 그렇게 나만의 길을 걷는다.
암스테르담
Polymer Conference가 때마침 열리기에 첫 여행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다. 하나같이 키가 큰 이 곳의 사람들을 곁에 두고 중앙역 근처부터 반고흐 뮤지엄이 모여 있는 시내 중심부까지 세바퀴를 다리 아플때까지 걷고 걸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내가 정말로 여행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길을 실제로 걷는 것 뿐이다. 그들의 삶처럼 이 도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회하다 보면 이 곳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아침에 관광객으로 들썩이는 잔세스칸스 풍차 마을을 들렀고 반 고흐 뮤지엄에서 반 고흐의 작품들을 관람하고 (생각보다 심심했다) 저녁에는 동행을 만나 하이네켄 박물관에 갔다. 그럭저럭 맥주 제조 과정 지켜보고 동행과 함께 맥주 한잔 들이키며 세상 이야기 나눌때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동질감일까 안주 없이도 술이 잘 넘어갔다. 홍등가 근처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앞으로 계속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동행을 하다 보면 회사를 때려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마주 보게 된다. 여행을 통해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을 가로지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된다.
유럽인들이 찾고자하는 로망 같은 도시인 이곳은 지정학적인 위치로도 좋기에 여러 컨퍼런스가 열린다. 내가 참여한 컨퍼런스도 이런 위치가 플러스 요인이 되어 열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즐겨보는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기고해서 다음달 호에 볼 수 있다.
런던
런던에서 남은 여행기간 동안 함께 동행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히스로 공항에서 그 중심부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생각보다 좁은 지하철에 전화도 안되는 노선이 많다 보니, 주변에 신문지가 널부러져 있었다. 사람들도 우리나라 지하철에서 보는 광경과는 생판 다르다. 그리고 드는 생각. 런던 사람들 대부분 옷을 참 잘 입는 것 같다. 비가 엄청오는 거리를 헤치고 그 친구를 만나자마자 친구는 말도 안되게 폰을 잃어버렸고, 그가 미리 예약한 호스텔로 갔다. traveljoy라는 호스텔이었는데 6인실이었음에도 무척 괜찮았다. 특히, 아침의 팬케이크와 오믈렛 조식은 환상적. 원래, 에어비엔비로 방을 알아봤으나 이 런던 쪽 호스트는 대부분 제의를 거절해서 급하게 잡은 것이었다. 물가는 듣던대로 비싸다. 기본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음식도 20파운드 가량 우리 돈으로 3~4천원하니 이 곳의 유학생들은 나름의 자린고비 정신으로 버텨야할지도. 하지만, 도시 자체는 정말 좋았다. 특히, 야간의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로맨틱한 불빛은 이 곳이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라 어필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새 폰을 사기 위해 북런던으로 갔다. 런던 중심부와는 다른 현지 마을이었고, 그 곳에서 폰을 사고 내려오는 길에 화이트하트레인을 거치게 되었다. 알다시피 한국의 손흥민이 입단하여 앞으로 국민팀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큰 토트넘의 구장으로 잠시 들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Qarabaq과 유로파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그 근처에는 티셔츠를 판매하는 노점이 있었는데, here comes the son 이라는 손흥민을 매개로한 티셔츠가 있었다. 우리 보고 한국인이냐고 물으면서 오늘 손흥민의 출전이 기대된다고 하였다. 아쉽게도 나는 미리 예약한 저녁 뮤지컬 공연이 있기에 돌아가야만 했다. 이 날 유로파 데뷔전에서 손흥민은 두 골을 몰아쳤다. 내가 보게된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영상으로 이 곳 런던에서 열린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취미로 뮤지컬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정말 내가 영상에서 본것과 마찬가지로 흐트림 없는 그들의 음악과 노래가 나를 동요시켰다. 예전 혹은 이 여행을 떠나기 전 공연했던 뮤지컬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런던 마지막 날, 자전거를 빌려 스탠퍼드 홈구장을 둘러보고 공원을 가로 질렀다. 저녁에는 구글 캠퍼스에 잠시 들러서, 세미나를 들었고, 마지막 런던 밤은 동행과 함께 야경을 보기로 했다. 빅밴 근처의 강을 따라 다리를 건넜고, 런던 프라이드라는 환상적인 맥주를 찾았다. 야경을 보며 둘러앉아 맥주를 들이켰고,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다시금 찾아오겠다는 설레임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소변이 너무 마려워 부리나케 뛰어갔다. 유럽은 참 화장실 찾기가 너무 힘들다.
다음날 파리로 유로스타를 떠나기 전, 내가 염원하는 일정이 있었다. 바로 첼시와 아스널전. 스탠포드 경기장에서 열리는 이 경기는 워낙 빅 더비 경기이기에 모든 표가 일찍 매진되었고, 나도 여러 경로로 구하려고 애썼으나 한국인들이 값을 세게 부르는 바람에 일단 계획을 접었어야 했다. 근데, 어제 홈구장 근처를 지나는 도중, 현지 암표상을 만나 140파운드에 딜을 하게 되었고 나는 간신히 좌석을 구할 수 있었다. 동행 친구는 이따가 펍에서 관람하기로 하고, 나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근데 빅토리아 역 부터 요란한 응원가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스널 응원 훌리건들이 길을 에워싸며 응원가와 ‘뻐킹 무리뉴’라는 비하 소리를 내뱉었다. 끝내는 지하철의 자신이 있는 칸에 다른 첼시 팬들이 못올라타게 연신 ‘fuck off’를 외치며 실랑이를 벌였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훌리건들의 모습인가. 지하철 내에는 첼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향하는 듯 했다. 점점 나의 기대와 설렘이 극에 달했고 경기장에 도달하자 정말 수많은 인파가 스탬포드 브릿지를 에워 쌓았다. 기마를 탄 경찰이 양 팬들을 인솔했고 경기장에 들어서자 내가 영상으로만 보았던 스탬포드 경기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첼시 홈팬들, 왼쪽에는 아스널 어웨이팬들. 서로 응원가를 주고 받으며 경기가 달아오를 때 마다 격한 흥분과 응원을 도맡았다. 이번 경기에는 퇴장이 두 명 있었고 특히 첫번째 가브리엘의 퇴장은 디에고 코스타의 설전과 추후에 징계가 있었던 사건이 벌어졌다. 사실, 이 퇴장이 이번 경기의 큰 변수로 작용했기에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은 모두 흥분을 멈추지 못했다. 스코어는 2 대 0. 첼시의 승리. 예상대로 경기가 끝나자 약간의 소동이 벌어졌고, 내 동행 친구는 이번 경기의 촉매인 디에고 코스타 가면을 쓰고 첼시 팬들과 부등켜 안거나 성난 아스널 팬들에게 손찌검을 당할뻔 했다. 그 근처에 펍에 무작정 들어가 우리는 그들의 유쾌한 첼시 응원가를 듣고 그 분위기를 이해했다. 디에고 가면을 쓰고 현지인이 아닌 동양인이 그 펍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으니 다들 유쾌하게 ‘hey diego’라고 부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아 주말마다 이런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이 도시가 참 부럽다. 깨끗하고 사람들 참 젠틀하고 이런 여러 흥미거리가 있는 이 도시의 삶. 분명 잊지 못한다.
파리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를 향했다. 사실, 안 좋은 사건들이 파리에서 많이 일어났었다. 도시는 참 알록달록하고 느낌 좋았지만, 이 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이 곳의 느낌을 조금씩 망쳐 놨다. 소매치기에 대한 경각심은 미리 얘기를 많이 들어 준비를 많이 했었고, 숙소로 가는 길 또한 수월했다. 숙소는 에어비엔비로 구한 파리의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참 안락하고 좋았다. 문제는 호스트가 체크인 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남친이 우리를 맞이했다는 것. 간단하게 문을 어떻게 따고 닫고 집 내부를 설명하고 떠났고, 우리는 이곳에서 간만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해 먹었다. 다음날 아침, 거리로 향하는 도중에 폰을 떨어뜨렸다. 그 계기는 프랑스어로 감사하다는 말이 ‘merci’가 맞는지 찾으려다가 폰을 꺼낼때 부딪히며 떨어뜨리게 되었다. 동행 친구는 이런 거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왜 굳이 찾으려고 하냐고 핀잔을 줬고, 사실 직업병이 도사리고 있는지라 액정이 깨져 아무런 터치가 안되는 아이폰을 붙잡고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그 이후 파리,바르셀로나,뮌헨 애플스토어에 모두 가보았지만 ‘오늘 예약 대기 줄이 길어서 수리가 불가능하다’라는 대답만 얻을 뿐이었다.
특별하게 이곳에서 누구나 다 가는 루브르나 오르쉐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는 흥미가 없었다. 영화 ‘비포 선셋’에 나오는 장면처럼 센느강 근처를 따라 쭉 걸어보고 싶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에펠탑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고장난 핸드폰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리를 스쳐갔다. 이 상태로는 아무런 메시지도 확인할 수 없었고, 길을 잃으면 지도를 펼칠 수 없으니 동행을 무조건 따라다녀야 했고,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이런 고충이 지금의 내 여행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짜증도 시간이 흐르자 금세 녹아 내렸다. 이것 없이도 나는 잘 걷고 잘 살고 있고, 모든 문제는 이 도구를 항상 지녔던 내 습관으로 비롯된 두려움이라는 것을.
파리는 참 느긋한 도시다. 점심에도 사람들이 야외에서 삼삼오오 모여 와인과 함께 음식을 음미하며 대화하고 있었고, 잔디밭이나 호수 정원에 누운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자연스럽게 동화되곤 한다. 레스토랑에 가도 마찬가지,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오기까지 30분이나 걸렸다. 그에 따라 바슈타슈를 타고 센느강을 따라 파리의 야경을 보려는 계획이 촉박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열시가 막차이다보니, 허둥지둥 밥을 먹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행을 찾아 나섰다. 그 동행들은 몇 시간 전, 사진을 찍어주다 알게 된 사람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그 선착장은 원래 타려했던 바슈타슈 선착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의 2km나 떨어져 있는 그 곳을 향해 다함께 야밤의 달리기를 했다. 바슈타슈를 타고 파리의 야경을 보며 에펠탑의 반짝반짝 빛나는 세레나데를 보며 감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파리 에펠탑 근처에서 잔디에 둘러 앉아 노상을 까는 일. 그 근처에는 맥주와 와인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고 우리는 계속 흥정을 하며 깎아 내렸다. 낮에 봤던 세네갈 출신의 기념품과 셀카봉을 들고 다니던 노점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에펠탑에 불이 꺼지는 것 까지 본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갔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 다만 그 파리의 느긋함이 다음 일정까지 방해할 줄은 몰랐다. 다음날 일찍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공항을 가야 해서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느긋하게 제때 도착하리라 확신하며 출발했다. 샤를 드골 공항은 생각보다 너무 복잡했다. 터미널도 여러 개고 어디가 체크인 하는 곳인지 간판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결국 출항을 십분 남겨두고 이번 비행기를 놓칠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 순간 여기까지 뛰어왔던 우리가 참 한심했고, 좀 더 재빨리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폰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전적으로 동행 친구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그 친구에게 돌리며 이 문제에 대한 화를 조금이나마 회피하고자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비행기 티켓을 끊은 우리에게 마주한 다음은 설상가상이었다. 공항에서 메일을 체크하자, 파리의 호스트가 우리에게 300유로를 청구한 것이었다. 문득 준비된것처럼 보이는 그 글엔 우리가 청소를 제대로 안 했고, 의자가 약간 부러져있었다며 긴 글의 장문으로 보내왔다. 우리는 억울했고,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에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호스트가 수상했으며, 이에 대한 규칙을 상세히 공지하지 않은 에어비엔비를 문제 삼았다. 어쨌든, 이런 엉뚱한 상황이 한번에 겹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것도 여행이지~.
여행 내내 이어진 에어비엔비 그 호스트와의 공방에 그녀는 나에게 위험한 사람이라고 묘사했고 나는 그 호스트와 관련된 방을 외부 커뮤니티에 이 이슈를 만천하에 알리고, 만에 하나 에어비엔비 측에서 청구가 나오는 즉시 모든 소송과 손배를 불사하리라고 으름장을 놨다. 여행 내내 계속 이어져 나를 굉장히 성가시게한 그 사건은 지금 글을 쓰는 오늘 에어비엔비가 그 호스트의 주장을 거절했다고 결론을 내어 끝났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 결과가 고맙고, 아마 그 호스트가 나에 대한 후기를 어찌 남겼는지 모르지만, 나도 외부에 그 사실을 알릴 것은 확실하다. 동양인이라고 쉽게 보였나. 미안하지만 사람 참 잘못 걸렸다.
바르셀로나
비행기를 늦게 타다 보니, 바르셀로나의 일정이 자연스레 짧아졌다. 올라~. 바르셀로나의 첫느낌은 좋다. 뭔가 일이 모두 잘 풀릴 것 같은 느낌. 공항에 내려서 시내의 비치에 위치한 숙소로 가야 하는데 동행 친구가 시내로 이동하는데 20불이면 된다고 말하는 호객꾼에 걸려, 나도 빠르게 숙소로 이동하고 싶어 그를 따라갔다. 허름한 차에 짐과 우리를 태우고 앞에 두명의 남자의 양 손과 목엔 살이 탔는지 험상궂게 보이는 그들의 얼굴은 칼자국이 있었다. 무슨 영화에서 보는 마피아의 모습. 양 사이드미러는 깨져있었고, 다행히도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비치 앞이 아닌 그로 부터 3km나 떨어진 곳에 우리를 선착시켰고 30불이나 빼갔다. 짜증나지만, 빨리 호스트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짐을 질질 끌고 비치로 향했다. 올라를 외치며 호스트와 그의 가족과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이번에 빌린 에어비엔비 숙소는 선상이었다. 한번도 안해본 경험이었기에 내가 계속 갈망했던 곳이다. 생각보다 기대 이상이었다. 정말, 이번 여행 중 최고의 숙소라 생각할 정도로. 밤에는 별을 보며 샹그리에를 들이키고, 아침에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앉아있는 그 기분이란. 또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어떻게 보면 이 숙소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한창 메르세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숙소에 짐을 풀고 빠르게 나와서 시내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었고 재즈 공연에 맞춰 옹기종기 모여있는게 전부였다. 우리는 심심한 나머지 동행을 구하여 샹그리에 한병을 들고 근처에 모여 앉았다. 밤늦게 까지 마신 우리들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있는 숙소 근처가 클럽 번화가로 둘러 쌓여 있는 핫 플레이스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근처에서 shisha라는 물담배를 들이키고 바로 앞에 있는 숙소로 자러 갔다. 그 다음날 우리는 정말 늦게 일어났고, 오늘도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우디를 보러 가는 도중에 나는 길을 잃었고, 폰이 없는 나를 찾기 위해 동행 친구는 사방을 찾아 헤맸다. 나는 멍청하게도 종점 끝까지 왔다 갔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희망으로 한국에서 사온 초콜릿이나 무작정 씹어댔다. 다행히 재회한 나와 친구는 가우디를 구경하고 마지막 바르셀로나 저녁은 제대로 먹으며 보내자라는 생각으로 동행을 찾았다. 문제는 또 그 때부터. 같이 만난 동행은 우리에게 제대로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맛집으로 가자고 재촉했고, 내 동행 친구는 감정이 폭발했다. 항상 쾌활했던 그와 다르게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는 마주 앉아 음식을 조용히 음미했고 그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지막 밤이기에 나는 계속 그들을 토닥였고, 결국 우리 선상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다행히도 그 앙금을 풀고 샹그리에를 마시며, 우리가 먹고싶다고 노래했던 타파스를 먹으러 갔다. 숙소 근처에 레스토랑이 많이 있기에 그중 하나를 간 것인데, 그 타파스는 이번 여행지 중 베스트 음식에 속한다. 역시, 맛집이고 뭐고 그런거 다 필요없다. 본능적으로 어떤 상황에 따라 가서 먹느냐에 따라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밤이기에 뭔가 아쉽고 서글퍼졌다. 바로 뒤쪽에는 비치가 있기에 바람을 쐴 겸 그 쪽으로 같이 나갔다. 그런데 어제 썰렁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비치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길을 걷던 여자애한테 물어봤다. 쟤네들 어디가냐고. 콘서트를 간댄다. 아 그래? 그럼 우리도 함 가보자. 그렇다. 우리는 정말 제대로된 로컬 축제를 즐겼다. 족히 삼만명은 되어보이는 수많은 인파가 비치에 모두 깔렸다. 저 앞으로 가수들이 흥겹게 음악을 틀고 있었고 카탈루냐 국기를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현지인과 함께 놀았다. 카탈루냐의 프리덤을 위한 구호를 같이 외쳤다. 우리는 그 곳의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함께 강남 스타일을 추고 락페에서 보던 옆치기를 해댔다. 이렇게 재미있는 축제는 겪어본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황홀한 밤이었다. 근데 정말 재미있게도 공연이 끝나자 바로 비가 엄청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되게 말이다. 수많은 인파에 밀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비에 온몸을 홀딱 젖었고 우리는 동행을 데리고 선상으로 향했다. 사실 그 상황은 아무도 폰이 잘 작동하는 사람이 없었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숙소로 가는 길에 현지 젊은 아이들을 보니 비가 오든 말든 정말 화끈하게 웃고 마시며 놀고 있었다. 얘네 흥은 우리 흥과 약간 비슷하면서도 더 과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여하튼 그런 면에서 쉽게 친해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르셀로나 마지막 밤이 저물어져만 갔다.
뮌헨
뮌헨에 도착했을때, 밤이 되었다. 차 렌트를 하고 나갔고, 우리가 이번에 묵을 숙소는 에어비엔비에서 검색한 뮌헨에서 30km나 꽤 떨어진 시골이었다. 역시, 오늘도 그냥 넘어가게 내벼두지 않는다. 숙소는 완전한 독일 현지 시골이었기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차로 그 곳이 도대체 어딘지 배회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에 문을 두드리고 위치를 묻게 되어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노부부 두 분이 우리를 맞이했고, 배고픈 우리에게 빵과 계란과 소시지를 제공해주었고 넓은 방을 소개해주었다. 역시, 엄청나게 큰 방이었다.
다음날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일찍 길을 나섰다. 뮌헨 자체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고, 시청사 구시가지 주변에 있는 학센바우어에 점심을 먹었다. 독일식 소시지와 학센, 맥주등을 시켰고, 꽤 먹을만 했다. 옥토버페스트 축제는 뮌헨 전역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독일 축제 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즐비한 곳에 갔었는데 다양한 놀이기구가 있었고,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중심 부스에 가니 한껏 취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정신없이 종업원들이 맥주와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보니 우리가 미리 부스를 잡은 곳은 이 곳이 아닌 듯 했다. 이 곳에서 세정거장 떨어진 다른 곳이 었고, 보통 중심가의 부스는 1년 전부터 예약을 받는 반면, 우리가 예약한 곳은 중심가 부스를 예약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여섯시반부터 시작되는 행사에 축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히 모여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맥주를 한껏 마시며 독일인들과 같이 구호를 외칠때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고 건배했다.
다음날 뮌헨에서 열린 oktoberheckfest 해커톤을 밤새 진행했었고(이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기고), 해커톤이 끝난 후 우리는 뉘른베르크로 이동했다. 평균 160에서 200km까지 속도를 내며 도착해서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저녁과 아침에 뉘른베르크 성 주변을 홀로 산책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추억과 느낌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과거와 앞으로 있을 미래. 불확실한 현실이 어쩌면 지금 여행과 별로 다를게 없다는 생각은 모든 것이 담담하게 다가왔다.
베를린
이제 마지막 도시 베를린. 우리 에어비엔비 숙소는 turkish 거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근처에 케밥 집이 많았고 많은 터키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무작정 길을 떠나 걸었다. 걷다보니 베를린의 명물 TV 타워를 볼 수 있었고, 그 주변을 따라 걸으니 많은 박물관과 예전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조형물을 볼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의 잔해도 보고나니 이 곳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꽤 있었다. 물가도 저렴하고 유럽의 최대 테크 시티로 발돋움하여 많은 창업가들이 이 곳으로 모이고 있는 점은 충분히 괜찮은 도시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근교인 드레스덴에 잠깐 들려 오래되고 불에 타오른 흔적이 남아있는 여러 성과 조형물을 보고 왔다. 참 아름다운 도시.
베를린의 코워킹 스페이스 및 엑셀러레이터인 베타 하우스에 들려 그 곳에 있는 한국인 팀들을 반갑게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고, 팩토리 베를린과 그 근처의 코워킹 카페에 들러 실제로 어떤 규모로 커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았다. 다양한 국적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며 꿈을 꾸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나도 한낱 좁은 땅의 개구리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모든 여행 일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여행이 끝나고 앞으로의 다시 올 여행을 기다리며 지금 내 스스로를 현실에 맞춰 고양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현재 이 순간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시작했다. 시작과 끝이란 정의보다는 여전히 계속 진행중이라는 말이 내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이다. 나는 여전히 잘 가고 있고 계속 떠날 것이다. 그 떠남은 현실의 도피가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러 다니는 도전과 열정의 시작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는다.
(곧, 특별히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여 게시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