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2017. 1. 23. 14:26


제주에 왔다. 

작년 이맘때는 때아닌 폭설로 서귀포에 며칠 동안 묶인 적도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다가도 매서운 눈바람과 진눈깨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이 날씨 조차 이 제주의 매력이다.

푸른 바다 앞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코딩 문제를 풀다가도, 사색에 잠기고 이 곳의 여유와 낭만을 흠뻑 느끼는 이 순간이 좋다.

다만, 요즘 내가 목표로 하는 해외의 여러 회사 리쿠르팅의 새로운 기회와 파이널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럴때마다, 내가 이 길을 잘 가고 있는지, 이렇게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집중하는 일이 잘하고 있는 건지, 심지어 내가 잘 지나 왔던 길인지 의구심이 문득 찾아온다.

올레길의 다양한 매력에 빠졌다. 언덕과 초원, 산, 시골마을, 해안가를 걸으며 깨끗한 공기와 자연의 원초적인 소리를 느끼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득 찾아오는 근심도 이곳의 바람을 따라 자연스레 보내본다.

내가 정녕 잘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이 순간 안하면 후회할 일은? 

다양한 인연도 좋다. 단편적인 만남도 좋다. 하지만, 바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토닥일 수 있는 인연은 지금 이 순간 없다. 

결국, 위로받고 싶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내라고, 실패에 비굴하지 말고 나아가라고. 단지 인연이 아닐 뿐이라고.

그럼에도, 이 여행과 자연은 이러한 생각을 다시금 되새겨준다.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 

당분간 돈을 못벌어도, 원하는 커리어를 추구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에겐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조금 더 느긋해도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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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회고

2016. 12. 16. 14:57

이제 2016년을 어느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굵직한 일들이 마무리되면서 조금 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필요한 이 시점,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정신없이 흘러갔던 이 시기와 다음의 여러 계획들이 공존하면서, 이럴 때일 수록 자신이 정말 원하는게 무엇인지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한다는 연륜도 생긴 그런 서른이다.

사실, 올해만큼 다이나믹한 한해도 참 오랜만이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키워드는 '실패'다. 여러 의미로 활용될 수 있는 이 '실패'를 올 한해 너무 많이 거쳐오다보니, 이제는 면역력이 생긴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고자 하는 건지, 다시금 스스로를 다독이며, 너는 충분히 가치있고, 멋지고 잘 해내고있다고 암시를 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요즘이다. 이제는 이 감정과 답답함을 스스로에게 숨기지 말아야겠다. 나를 정녕 믿는다면, 죽음 이전의 절박함과 젊음의 패기를 활용하여 이 모든 과정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는 의미가 없을진대. 하지만, 나는 사회안에서 사회인으로 살고있으며, 그와 밀접한 삶과 미래가 있기에 롤러코스터처럼 출렁거리는 이 감정과 이성은 빠져나갈 수 없는 정글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키워드는 '배움'이다. 기술을 배웠고, 사회를 배웠고 사람을 배웠다. 이 배움과 경험이 공존해있는 회고록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순서는 생각나는대로.


1. 리모트 워킹

작년에 오랫동안 일했던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회사로 적을 옮겼다. 그 이전부터 이 회사에 기술적인 도움을 주었고, 함께 미국시장에 뛰어 들어가 내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싶은 열망에 부풀었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방향이었다. 나는 조건 없이 미국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한 순진한 개발자일뿐. 커리어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일했던 경험은 현재도 리쿠르터들이 오해의 여지만 남길 수 있는 병목이 될뿐이다. 그럼에도 배운것은 미국에 있는 CEO와의 리모트 워킹 경험. 대부분 온라인 상으로 리모트 워킹을 했고, 그에 따른 다양한 장점 및 단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다. 제주에서 훤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작업하고 산책했던 여유와 고즈넉함. 대설이 와서 제주에 묶였던 경험등. 처음 해보았던 경험은 늘 소중하다. 참고로, 이 일을 계기로 순진함의 탈피와 이 업계에 만연해있는 이름 좀 알려진 한인 사업가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 리모트 워킹의 성지라 불리는 발리로 갔고, 거기서 내가 만들고 싶은 서비스를 기획하고 개발하고 다른 외국인들 앞에 발표도 하면서 리모트 워킹의 가능성과 불편함 두 가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돌아왔다.

2. 사기

사모펀드 관련한 투자에 대한 사기를 당했고, 천여명에 이르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지금까지도 법적 공방에 엮여있다. 생전 처음으로 배상신청도 해보고 법원에도 참관하여 피의자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식 변론을 듣고 있자니, 이 법과 밀접히 연관된 사회의 다양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국민을 위한 법이 무척 약하다는 사실과 함께, 최순실 부터 시작된 현 꼭두각시 대통령의 사건을 보고 있자니, 이 한국에서의 삶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3. 사업

다양한 정부지원 사업에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떨어지는 일이 수없이 반복된 가운데, 다행히 통과된 몇가지 사업이 있었고, 창업 교육과 함께 실제로 사업을 수행하고, 서류처리와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처리했다. 기획,개발,홍보의 처음과 끝을 모두 경험해보았고, 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3년만에 다시 만난 친구, 다양한 경험과 기술을 가진 창업가 친구들과 친해진 것은 무척 든든하다. 그 밖에 지금까지 이 업계에 있으면서 진솔하게 쌓아왔던 여러 사람 네트워크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 만으로도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었다.

4. 외주

사기로 떼인 돈을 메꾸기 시작한 외주건. 운좋게도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났고 월 최고 수익을 경신했다. 하지만, 외주 프리랜서 일이 내 종착지는 아니기에 이정도로 만족 및 마무리. 그래도 이 업계에서 내 기술로 굶어죽을 일은 얿겠다는 자기 확신을 얻었다.

5. 파티

사업과 관련있는 다양한 파티에 참여도 하고 개최도 했다. 외국인 파티부터 게하 파티, 소셜댄스 파티, 전주 낭만시대 게하에서의 파티 개최. 시국이 안좋을 때 외지에서 파티를 진행하다보니, 비오는 날에도 전단지 및 홍보 포스터를 붙이며 고군분투 했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파티였다. 그럼에도 이 파티의 즐거움과 애로사항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들.

6. 해외취업

실리콘밸리부트캠프라는 실리콘밸리로 진출을 원하는 개발자들과 디자이너, 그리고 다양한 멘토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에서, 해외취업을 위한 여러 과정을 거쳤다. 인터뷰부터 알고리즘 스킬, 다양한 레쥬메를 apply해보고, 폰 인터뷰도 해보고, 면접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었고, 영어 스킬의 지속적인 학습과 성장, 다양한 인터뷰 스킬들을 적용해보며, 세계의 소프트웨어 개발 시장도 확인하고, 어려움을 느끼는 과정이 현재도 진행중이다. 아마 지금껏 200건 넘게 지원을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렵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적응이 되어 능숙해졌고,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이젠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단지 fit 이 안맞을뿐.


난 이번 한해가 시행착오의 해라고 여기고 있다. 이 사회 및 사람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며 실패하고 배운 경험들.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나는 날아 오를 것이다. 이제는 어린 애벌레가 아니기에 더욱 더 하늘을 향해 날개 짓 할 수 있다.

Posted by Elegant Universe

망할. 커피를 많이 마셨나. 피곤하지만 각성의 상태가 내 졸음을 쫓고 있고 따뜻한 온매트의 숨결도 도움이 되지 않아 이불을 헤치고 의자에 바로 앉아 이야기를 끄적이고 싶은 생각이 번뜩 났다. 그렇다. 망상이다.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다. 생각을 정렬하기 위한 도구다. 한편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희망찬 노래다. 

참 오랜만이다.


간만에 휴가기간동안 어디 안싸돌아다니고 근처를 배회하며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 그런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지금 가는길이 맞는지에 대한 물음표일 수도, 다음 단계를 계획하기 위한 선행 학습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답없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방황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나, 무척 현실적이 되었다. 

현실을 깊이 응시한다는 것이 내 앞으로의 미래와 이상과 자존감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문제를 깊이 체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실제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에 따른 반등으로 무모함이 줄어들 수 있다. 과거에 스스로에 주입시켰던 무모함이란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다는 겁없는 패기와 직결되어 있었다. 지금 그런 패기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삶의 굴레 속에 빠져있다 보면, 서서히 겁있는 패기로 변질된다. 


홀로 독수공방할 것이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일은 가족과 친구와 회사와 이 사회 그리고 더 넓게 봐서 국가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반대로 그 존재들로 인하여 내가 하는 일에 제약이 생기고 그들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특히, 지금과 같이 스마트한 세상에 수많은 메신저와 sns로 부터 오는 소음은 차치하더라도 무엇이 내 삶을 이끄는 걸까 라는 물음에 스스로에 대한 답변보다 타인의 욕망에 지배당하기 점점 쉬워지는 것을 몸소 느낀다. 


시간이 빠르게 흐를 수록 이 사회에 동화될 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 길이 옳은 길이라 다짐한다. 불확실한 미래와 언제 들여닥칠지 모르는 소소한 행복의 줄타기에서 내가 만든 꿈꾸는 미래를 바라보며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서서히 서른이라는 숫자가 눈 앞으로 달려드는 이 치국을 위로한다.


마지막 생각을 남겼던 시점부터, 기술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성장을 했다. 여행도 다니고 원하는 기술 스택 습득과 다량의 독서, 만들고 싶었던 서비스 런칭, 소소한 취미생활까지 이런 경험들이 나의 삶을 도닥였고 그 옆엔 언제나 소소한 행복이 나를 반겼다. 


이제 앞으로의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라는 몽상 따위로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기엔 인생이 짧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 미래는 지금 현재 이 순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이 일들을 꾸미는 자신만이 모든 것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당연히 희망차야할 이 모든 순간들에 나는 소소한 미소를 보낸다. 그것이 내가 이 인생을 사는 이유이며 꿈을 꾸는 방식이다.


내일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이만 망상을 줄이련다. 마지막 곡은 공교롭게도 김광석의 '다시 아침' 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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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며

2012. 9. 4. 23:38

어느덧, 더운 여름을 가시게 하는 가을 입문 비가 흐느적 내린다. 

이렇게 수소문 없이 가을이 찾아오고, 낙엽이 떨어질 때쯤 추운 겨울이 오겠지.


몇달 동안 글을 길게 끄적이지 않았다. 말이 많고 싶지 않았다. 신세 한탄하거나, 스스로 다짐하는 글 따위 적기보다 가시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보여주는 대상이 나든 주변 사람이든 스스로의 변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결과는 중박이다.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꾸준히 한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선택한 것들. 이 선택에 대해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의 기로가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어떤 선택을 했든 지금은 지금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제대로 된 시작이라고. 그것이 나라는 상품을 이 시장에 비싸게 팔 수 있는 고급 인력으로 가는 길이든, 나만의 혁신적인 무언가를 이룩하는 길이든, 난 이제까지 은연중에라도 내 인생이 자신 있었고, 그것이 자존감으로 대두되는 신념으로 버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약하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안되겠다!

라고 머릿속으로 되늬웠던 날이 수도없이 많아졌다. 주말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위해 절친한 친구놈 붙잡아 그 마음을 비추는 것도 이제 질릴만 했고. 그럴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여행 중에 미친 짓을 한 적이 있다. 승부역이라는 오지역을 가려고 했는데,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버스와 도보를 통해 그 곳을 향해  가겠다는 미션. 비가 퍼붓는 야밤에 아무런 빛도 비추어지지 않는 깡시골 마을 도로를 걸어가며, 난 두려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헤드라이터에 의지한 채 걸어가는 내 자신에 무슨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추적추적 대는 빗소리 만이 들리는 칠흑같은 암흑세계가 나를 짓누르는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결국, 가까스로 그 역에 도착했을 때, 느낀 것이 있다면 그 두려움과 공포는 스스로가 주입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지금의 나는 그 두려움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조급해하는 듯 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단순히 넘겨보며, 아둥대는 현재의 모습이 무척 찌질해 보였다. 그럼에도, 나름의 노력을 한 것에 대해 위안을 삼아야할지, 더욱 채찍질을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 나는 기꺼이 마음을 먹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그 미래의 두려움이 점차 사라질 거라는 믿음.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신중하게 힘을 싣고, 그 곳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추진력이 

지금의 젊음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너무 큰 자존감이, 허둥대도 만족이라는 합리화로 나의 앞길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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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기로.

2011. 11. 22. 01:16

제대로 써야겠다. 지난 글은 감정의 초점이 없었다. 
적어도 내 생각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내면의 미묘한 감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이 곁들여져 손이 움직여야 한다. 과거의 글들을 읽다 보면, 분명 그 당시 그 시간의 격양된 감정이 떠올려지곤 한다. 이제 그 과거와 같은 형태의 글은 더이상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내면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닌, 적절하게 감정을 조절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방식을 조금은 터득하게 된 연륜일까. 적어도 나이는 헛먹은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이십대의 중반에 다다른 하룻강아지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이 먹은 사람이 더 나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의 방향과 그로 향하는 과정이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제 곧 있으면, 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세상물정을 일부러 등한시하던 나의 태도를 바꿨고, 나만의 아이디어로 설계하고 창조해내는 과정은 그 당시 물리학 학문을 공부할 때 만큼 짜릿한 즐거움을 주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하는 일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 재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여 나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것을 목표로, 지금까지 무작정 달려왔다.

4년 전의 목표가 성공했다면, 지금쯤 큰 웹서비스로 성공하여, 어떠한 절박함 없이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절박함 없이 사는 것이 나에게 어떤 행복을 던져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할지라도, 과거도 현재도, 나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은 돈이라고 보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분명, 나 또한 이 자본주의가 낳은 산물이고, 돈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 또한 불행해보이지만, 나는 그것을 가짐으로써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누구나 꿈이 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이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혁신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들. 나는 이 두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용히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모든 인간은 그러하기에, 공정하게 경쟁하여 나의 행복을 찾고 소소한 인생을 살면 충분하다. 이 세상에 그리 대단한 삶의 방식은 없다.

그렇지만,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로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재미가 있다. 결국, 내가 바라보는 모니터와 컴퓨터도 4년전에 비해 월등히 빠르고 커다랗게 발전된 것을 보면, 이 기술의 한복판에 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재미있을 거다. 음악과 소리도 그렇고, 기존에 없었던, 누군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 그것을 향하는 과정은 내 삶의 매우 재미있는 놀이이다.

하지만, 그 놀이를 하기에 앞서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한다고 깨닫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사람들과 부대껴 사는 사회에서 그들에게 서비스를 하고, 그들의 돈을 뺏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야했다. 재미있게도, 그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내부에서 수많은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단순한 패기로 달려들면 해결될 것이라는 초기의 낙관적인 태도도 이제는 겨울바람에 허덕이는 낙엽처럼 사그라들었다. 이 아이디어가 좋든 나쁘든, 결국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을 해야하고, 그만큼 투자할 수 있는 환경과 제대로된 기술과 팀, 시기적절한 운이 따라줘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만 벌여왔다. 그래도 헛된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소프트웨어를 만들든지 관련 책과 웹사이트를 뒤져보며 개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역량도 쌓았고, 어떻게 하면 팀이 실패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이 시장의 흐름과 앞으로의 미래도 추측할 만한 배경지식도 구축했다.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 사업계획서 써서 발표해서 많이 까여보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방식과 관계에 대한 잘못된 접근도 곱씹어볼 기회가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실패라는 관점을 들이댈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불완전한 인간의 게임일뿐 아니라, 앞으로의 수많은 실패에 비하면 미리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예방접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가 주는 실패를 받아줄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러라도 절박해야 한다. 제대로 된 준비를 미리 끝내놓고, 기회가 오면 그것을 붙잡아 실수 없이 실행해야 한다. 좋은 기회가 얼마만큼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최상의 운이 따라줄만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빠듯한 일상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주시하면서, 다음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파악할 만한 여유도 지니고, 그 생각들의 기반이 될 중요한 지식들을 섭취하면서 스스로를 독려해야한다.

그래서, 요즘은 기존의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사회,경제 등의 다양한 책들로 부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정리하고, 모르는 것을 채워가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는 그 책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고 반성하기도 한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세상이 복잡하지 않다면, 이렇게 노력해야할 이유가 없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게으른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답답하다. 이러한 수많은 지식에 자칫 함몰되다간, 모든 세상을 푸념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거리를 유지하고 여행자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삶의 방식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만족을 모르는 것도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는 것도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제 예전처럼, 외로움을 타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결국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과 내면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상, 그 관계의 끝은 똑같다고 본다.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도, 그 사람이 나를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것도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이 세상이 흐르듯이 수많은 사람이 내 곁을 스쳐가고 죽을 때는 홀로 쓸쓸히 갈 수 밖에 없다. 가끔씩 과거의 그런 사람들이 생각나지만, 모두 잊어버려야 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를 아는 사람들과 가끔씩 노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제 그리 어려운 것도 없다.

늙어간다. 얼굴의 수염도, 붉게 삭아가는 피부도. 그리고 눈에 보이는 흰머리와 체구가 작아진 부모님의 얼굴을 봐도 그렇다. 그래도 그들은 좀 더 잘 살아가려고 한다. 나도 좀 더 잘 살고 싶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내 생각의 방향만 잘 비틀면 된다. 잘 살고 있다고 낙관하며 살면 된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살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20대의 중앙 기로에 서서,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하다 보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희망을 낙관하며 사나 보다.
어쩌면, 그런 희망과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짧은 인생의 짧은 위안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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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3분(The First Three Minutes) - Steven Weinberg

이 지구 사회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보면서, 신비로움과 겸허함과 같은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지구 저 너머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조상을 찾고 거슬러 올라가, 생물과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이 책은 이 세상이 탄생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 우주탄생의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약작용과 전자기적 상호작용에 대한 통일적 모형을 제시하여, 197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로서, 이 책을 통해, 초기 우주론이 입자물리학의 주요 주제로 부상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우주 영화의 배경은 태초에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은 공간에서 빅뱅(Big Bang)이라는 대폭발로부터 팽창하는 공간이고 주 배우는 몇 가지 힘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몇 scene에서 어떤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질 것인지는 급격한 온도 하강 시점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힘이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우주의 최초의 3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 책은 이 물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어낸 전설이나 우화가 아닌 과학적인 계산의 결과로서 그려지는 일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처음 1, 1, 1년의 마지막 순간에 우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선뜻 믿기지 않을 수 있다. 뉴트리노 마저도 열 평형 상태에 있었던 순간부터 헬륨 핵 합성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의 빅뱅 이후 최초의 3분을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의 지식으로 그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그 진실을 얘기해줄지는 불확실하지만, 그 예측에 대한 가능성만큼은 탐구를 할 수록 높아져 간다.

 

사실,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우주론과 입자물리학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현상을 추론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기존의 일반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고전역학에서, 새로운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이를 만족할 만한 이론을 제시하려는 현대물리학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실험 아이디어를 제공 받기도 하고, 이론과 실험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현대 우주론은 20세기 초엽에 시작되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망원경과 레이더 같은 관측 장비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우주 배경복사 같은 현상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 현상으로 인해 허블의 우주팽창론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우주로 갈 수록 현재의 우주보다 점점 더 작아지고 물질은 밀집된 상태로서, 더 뜨겁고 고압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빅뱅우주론은 1920년대 허블에 의해 관찰된 우주의 팽창, 1965년 펜지아스와 윌슨에 의해 발견된 우주배경복사, 우주의 수소, 헬륨 등의 가벼운 원소의 분포가 그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최초의 3분은 이 원소들의 비율이 결정된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다. 와인버그는 물질세계의 기반이 이루어지는 최초 3분의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우주의 팽창과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을 통해 빅뱅우주론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먼저 설명한다. 또한, 급격히 팽창하는 초기 우주의 변모를 따라가다 보면 복사가 우세한 우주에서 물질이 우세한 우주로 바뀐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이 설명 방식은 사건의 원인 결과를 명료하게 짚을 수 있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와인버그는 과학적인 연구 접근 방법에 대해서도 지적을 했다. 6장에서 우주 초단파 배경복사의 검출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이전에는 이 복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없었던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이 세가지 이유 중에 한가지는 실험가와 이론가들 사이의 교신에 파국이 일어난 점을 들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등방성 배경 복사가 검출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정보 소통이 좋지 않아서, 실험가들도 오해를 하게 되었다. , 제시되는 이론에 따라, 실험이 검증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셈인데, 지금은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의 발달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점에서 정보의 불균형은 크게 줄어들었다고 본다.

 

와인버그가 말한 제일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이 당시, 초기우주의 이론들을 심각하게 취급하기가 물리학자들에게는 비범하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본다. 최초의 3분은 우리와 시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온도와 밀도의 조건들이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통상의 통계역학과 핵물리학을 적용하는 데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물리학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가 어떠한 이론을 내세웠지만, 정작 자신은 그 이론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 시간이 흘러 다른 학자가 새로운 개념을 주창하는 식으로, 물리학의 역사는 변혁되고 발전하게 된다. 와인버그 역시, 이에 대하여 지적한 바로는 우리의 과오는 우리가 이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의 많은 연구 과제에서도 한번쯤은 곱씹어 생각해볼 지적이다. 그리고, 학계의 흐름에 따라 대세가 되는 물리학적 연구 주제가 정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주제에만 집중하여, 다른 현상들은 그러한 노력을 들이기에는 적합한 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도 존재한다. 현재, 대학교 내의 연구부서도 각광 받는 분야에 따라, 그에 할당되는 예산과 연구원의 수가 다르듯이 현대의 과학 연구 시스템에 어느 정도의 장단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1965년에 3K 배경복사의 발견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공로는 우리 모두에게 초기우주가 있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느낀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론들이 서적에 일목묘연 하게 정리가 되어 우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쉽게 습득을 하지만, 그 이론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새롭게 이론을 만들고 입증해보는 작업을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기에, 이 일이 생소해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와인버그는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해하지 않고 과학의 성공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내가 물리학을 공부했던 접근방법이 많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흥미를 느낀 것은, 왜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된 것처럼 우주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른 것일까이다. 전자, 양전자, 뉴트리노, 광자는 미리 정해졌던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과정 사이의 평형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미량 포함되어 있었던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현재의 우주에서 원자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10분의 1초 후에는 300억도가 되었으며, 최초 3분간의 마지막에는 10억 도에 이르러 충분히 우주가 냉각되어, 양성자와 중성자로 된 중수소의 핵을 비롯해 복잡한 핵들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구성방식에 대하여 왜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핵물리학과 여러 우주 원리들을 제창하고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훨씬 뒤에 수십만 년 후에는, 전자와 핵이 결합해서 수소와 헬륨의 원자를 이루기에 충분하도록 식어서 중력으로 덩어리를 이루어 현재 우주의 은하와 별들을 형성했다. 정말 이 과정들을 차근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비롭다. 결국은, 나를 이루는 물질의 근원이 바로 최초 3분 동안에 마련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옳고 그름을 진정하게 확신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와인버그가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이론적 편견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론적 편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론적 편견의 옳고 그름은 그것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다. 이는 과학이 현 세대에 있어서 왜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농축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태초에 대한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에 밀접하게 닿아 있고, 현재까지도 많은 종교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최초' 이전은 대체 무엇일지, 이렇게 우연히라고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과정들을 과연 신이 만들고 계획한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와인버그 역시 8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한다.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우주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든 태초부터 언젠가 태어나도록 되어 있었다는 믿음을 인간이 갖게 되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듯하다. 이렇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든, 그 반대든 이 생각의 기로에서부터 과학은 큰 힘을 발휘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신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많은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우리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한다. 사실, 이 우주를 점점 이해하면 할수록, 그만큼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내가 아마존의 한 원주민으로 태어나 그 부족의 잣대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 세상과 우주는 변치 않는다. 하지만, 개중에는 '왜 그럴까?'라는 의문 하나만으로 우주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을 쏟아 놓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그런 제안 중에 가장 정직하고 논리 정연한 과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대 물리학은 복잡한 물리적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급 수학을 곁들어 정리하다 보니, 수학적인 계산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물리적 현상들은 직접 자연의 본질적인 단순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초기에도 미래에도, 거시세계에서도 미시세계에서도, 비슷한 단순성을 보여줄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거기에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이 없는 이상.

그래도, 최초의 3분을 통해,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이 우주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이 인간이 탄생하도록 진행된 방향은 137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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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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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실

모든 것을 무한히 의심하며 독단을 거부하는 과학의 논리와 방법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자세. 이것은 물리학자 파인만이 우리에게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5) 우리는 이 유산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설령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기술이 점차 발달되고 우리가 기술의 노예가 된다는 테크노폴리 시대의 도래를 닐 포스트먼이 지적했듯이 (닐 포스트먼, 김균 역, 『테크노폴리』, 서울-민음사, 2001, p.22) 현대사회의 과학문화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학문화란 과학에 대한 관점과 사회, 기술 등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인터넷, 휴대폰 등으로 인간관계의 틀까지 재정의 되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점도 있겠지만, 나쁜 점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로 인간성 퇴색을 문제로 삼는 닐 포스트먼 같은 사람도 있다. 물론, 과학만능주의라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큰일 나는 법’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꿰뚫어 보듯이, 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사회적 풍조를 견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학자체가 문제일까, 과학만능주의를 일삼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답은 둘 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제3자에 있다.


적어도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닐 포스트먼처럼 종교와 역사를 통한 합리화로 인간성 회복이라는 구차한 방식까지 갈 필요는 없다. 즉,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 사회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가치를 파생시킬 여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과학문화란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녀야 할지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세계관은 바로 보편성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과학은 그것의 지위를 서서히 하락시켰다. 지위를 하락시켰다는 의미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재고해서 생각해 볼 터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의 역사대로 따져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된 인간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고, 태양 역시 수많은 별 중에 하나일 뿐이고, 은하에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위상이 떨어지고만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슬로건으로 신을 찬양하게 만드는 교회 집단이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브루노의 화형과 갈릴레이의 탄압 같은 사상의 통제로 자유를 빼앗았다. 하지만,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의 역사적 위상이 일련의 진화적 결과라는 주장 같은 여러 신빙성 있는 결과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음으로써, 결국 과학은 승리했다.


과학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과 솔직함이다. 과학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이 객관적인 결과물도 과학자들은 절대 확신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그것을 의심하고 모든 진술은 확실성의 정도가 다른 근사적인 진술임을 인식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파인만의 생각을 가져오는 것이 옳을 듯하다. 파인만은 어느 문제이든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확실성을 찾지만,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즉, 우리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계속적인 의심을 통한 진보가 과학 발전에 절대 불가결한 원칙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46) 즉, 이렇게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이 사회가 더욱 정직하고 솔직해지는 것이다.


사회에 있어서, 이런 과학의 보편성과 정직함과 솔직함이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한 예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인을 국가가 통제하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에 대해 항의했고, 독일 아카데미로부터 탈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나치즘이 태동하기 직전, 독일의 그 음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과학인들마저 변질된 모습과 지식인들의 광기 안에서 나치즘의 발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Albert Einstein, 정진우 역,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서울-세시, 2005, p.260) 이와 같은 예로, 단지 과학을 하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돋보인다고 단정 지으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끔찍한 비도덕적 광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하려는 바는 과학의 이런 특성들이 도덕적인 구심점을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 또한 도덕적인 규칙을 제공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의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인생에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단적인 해답은 다른 해답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의 교리에 맞는 해답만이 우월하다는 생각 또한 큰 분쟁을 유발시킬 수 있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는 것은 솔직히 인정을 해야만 우리는 열린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일찍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든 사람들을 인도한 철학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방법은 18세기 말에 과학이 성공적인 모험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잠재 가능성을 활짝 펼친다는 것은 하나의 기회이며, 의심과 토론이 미지를 향한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도 명백해 보였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61)


과학이 이런 좋은 일만 한다는 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논의대상이 생기는 부분은 거의 모두가 과학의 응용과 관련되어진다. 나아가서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제도 대개 응용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과학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과학은 이 힘을 어떻게 써야하고 어디에 써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그 힘의 용도를 결정하고 응용하므로 전적으로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기를 처음 발견한 갈바니와 볼타는 후세의 전자기술에 대하여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뒷날에 이루어진 그의 발견의 실제적 이용에서 오는 이익이나 위험에 대한 책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발견을 통해 얻어진 지식으로 실제적으로 응용을 하는 과학자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컨대, 전화의 발명자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모든 연락을 좀 더 빨리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 화약의 발명자도 자기 나라의 전투력을 강화시키기를 바랐던 호전적인 권력의 위임 아래에서 연구에 종사한 사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300)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과학에 외부 권력과 생각이 침투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인 가치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물리학자 오토 한은 원자핵 분열을 발견했고, 그것을 다른 과학자들은 실제적으로 원자폭탄의 제조에 응용을 했다. 물론, 그 과학자들 각각의 사상과 생각이 지향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고 싶어 하던 전쟁지도층 아래에서 그 일을 수행한 것은 거기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물론, 여기에는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에 따른 문제가 있다. 미국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에 따른 히틀러의 승리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 미국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 무기의 사용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겠지만, 그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늦었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p.301~302) 결국, 그들의 책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어 과학 자체로 모든 시각을 돌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이다. 과학의 가치를 도외시하고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잘못을 따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 과학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사항은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과학 지식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여러 문제의 근원을 삼아야 한다.


극단적인 혹자는 과학을 하지 말고 문제의 씨조차 발생시키지 말자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현재,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을 무시하는 처세이며 상상력을 억압하는 생각이다. 즉, 인간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는 과학이 적용되는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불확실성의 정도를 줄여감으로써 새로운 해결 방향의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과학만능주의라는 것도 과학과 그것의 한계를 정확히 안다면 그리 나쁠 것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또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의 과학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방대한 스케일의 우주를 설명해주는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원자와 소립자 세계를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Brian R. Greene, 박병철 역, 『엘러건트 유니버스』, 서울-승산, 2003, p.21) 이렇게 설명한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는 뜻이 아니다. 완벽한 이해에 접근할 뿐 거기에 따른 불확실한 요소도 많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불확실한 요소를 확실하게 바꾸기 위한 정직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과학의 역할을 정확히 앎으로써,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과학문화의 입지를 굳건히 해야 한다.


과학의 시각을 재고하고 과학을 이용하는 인간에 도덕적인 덕목이 우선시된다면, 과학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바람직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사람과의 정직성과 솔직함이 사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부추기고,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올바른 과학문화를 양성함으로써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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