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진실

모든 것을 무한히 의심하며 독단을 거부하는 과학의 논리와 방법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자세. 이것은 물리학자 파인만이 우리에게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5) 우리는 이 유산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설령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기술이 점차 발달되고 우리가 기술의 노예가 된다는 테크노폴리 시대의 도래를 닐 포스트먼이 지적했듯이 (닐 포스트먼, 김균 역, 『테크노폴리』, 서울-민음사, 2001, p.22) 현대사회의 과학문화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학문화란 과학에 대한 관점과 사회, 기술 등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인터넷, 휴대폰 등으로 인간관계의 틀까지 재정의 되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점도 있겠지만, 나쁜 점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로 인간성 퇴색을 문제로 삼는 닐 포스트먼 같은 사람도 있다. 물론, 과학만능주의라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큰일 나는 법’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꿰뚫어 보듯이, 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사회적 풍조를 견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학자체가 문제일까, 과학만능주의를 일삼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답은 둘 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제3자에 있다.


적어도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닐 포스트먼처럼 종교와 역사를 통한 합리화로 인간성 회복이라는 구차한 방식까지 갈 필요는 없다. 즉,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 사회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가치를 파생시킬 여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과학문화란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녀야 할지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세계관은 바로 보편성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과학은 그것의 지위를 서서히 하락시켰다. 지위를 하락시켰다는 의미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재고해서 생각해 볼 터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의 역사대로 따져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된 인간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고, 태양 역시 수많은 별 중에 하나일 뿐이고, 은하에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위상이 떨어지고만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슬로건으로 신을 찬양하게 만드는 교회 집단이 이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브루노의 화형과 갈릴레이의 탄압 같은 사상의 통제로 자유를 빼앗았다. 하지만,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의 역사적 위상이 일련의 진화적 결과라는 주장 같은 여러 신빙성 있는 결과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음으로써, 결국 과학은 승리했다.


과학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과 솔직함이다. 과학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이 객관적인 결과물도 과학자들은 절대 확신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그것을 의심하고 모든 진술은 확실성의 정도가 다른 근사적인 진술임을 인식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파인만의 생각을 가져오는 것이 옳을 듯하다. 파인만은 어느 문제이든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확실성을 찾지만,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즉, 우리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계속적인 의심을 통한 진보가 과학 발전에 절대 불가결한 원칙이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46) 즉, 이렇게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이 사회가 더욱 정직하고 솔직해지는 것이다.


사회에 있어서, 이런 과학의 보편성과 정직함과 솔직함이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한 예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인을 국가가 통제하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에 대해 항의했고, 독일 아카데미로부터 탈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나치즘이 태동하기 직전, 독일의 그 음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과학인들마저 변질된 모습과 지식인들의 광기 안에서 나치즘의 발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Albert Einstein, 정진우 역,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서울-세시, 2005, p.260) 이와 같은 예로, 단지 과학을 하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돋보인다고 단정 지으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끔찍한 비도덕적 광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하려는 바는 과학의 이런 특성들이 도덕적인 구심점을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 또한 도덕적인 규칙을 제공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의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인생에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단적인 해답은 다른 해답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의 교리에 맞는 해답만이 우월하다는 생각 또한 큰 분쟁을 유발시킬 수 있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는 것은 솔직히 인정을 해야만 우리는 열린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일찍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든 사람들을 인도한 철학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방법은 18세기 말에 과학이 성공적인 모험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잠재 가능성을 활짝 펼친다는 것은 하나의 기회이며, 의심과 토론이 미지를 향한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도 명백해 보였다. (Richard Feynman, 송영조 역, 『발견하는 즐거움』, 서울-승산, 2001, p.161)


과학이 이런 좋은 일만 한다는 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논의대상이 생기는 부분은 거의 모두가 과학의 응용과 관련되어진다. 나아가서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제도 대개 응용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과학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과학은 이 힘을 어떻게 써야하고 어디에 써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그 힘의 용도를 결정하고 응용하므로 전적으로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기를 처음 발견한 갈바니와 볼타는 후세의 전자기술에 대하여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뒷날에 이루어진 그의 발견의 실제적 이용에서 오는 이익이나 위험에 대한 책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발견을 통해 얻어진 지식으로 실제적으로 응용을 하는 과학자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컨대, 전화의 발명자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모든 연락을 좀 더 빨리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 화약의 발명자도 자기 나라의 전투력을 강화시키기를 바랐던 호전적인 권력의 위임 아래에서 연구에 종사한 사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300)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과학에 외부 권력과 생각이 침투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인 가치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물리학자 오토 한은 원자핵 분열을 발견했고, 그것을 다른 과학자들은 실제적으로 원자폭탄의 제조에 응용을 했다. 물론, 그 과학자들 각각의 사상과 생각이 지향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고 싶어 하던 전쟁지도층 아래에서 그 일을 수행한 것은 거기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물론, 여기에는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에 따른 문제가 있다. 미국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에 따른 히틀러의 승리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 미국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 무기의 사용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겠지만, 그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늦었다.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서울-지식산업사, 2005, pp.301~302) 결국, 그들의 책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어 과학 자체로 모든 시각을 돌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이다. 과학의 가치를 도외시하고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잘못을 따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 과학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사항은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과학 지식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여러 문제의 근원을 삼아야 한다.


극단적인 혹자는 과학을 하지 말고 문제의 씨조차 발생시키지 말자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현재,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을 무시하는 처세이며 상상력을 억압하는 생각이다. 즉, 인간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는 과학이 적용되는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불확실성의 정도를 줄여감으로써 새로운 해결 방향의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과학만능주의라는 것도 과학과 그것의 한계를 정확히 안다면 그리 나쁠 것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또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의 과학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방대한 스케일의 우주를 설명해주는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원자와 소립자 세계를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Brian R. Greene, 박병철 역, 『엘러건트 유니버스』, 서울-승산, 2003, p.21) 이렇게 설명한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는 뜻이 아니다. 완벽한 이해에 접근할 뿐 거기에 따른 불확실한 요소도 많다. 하지만, 과학은 그런 불확실한 요소를 확실하게 바꾸기 위한 정직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과학의 역할을 정확히 앎으로써,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과학문화의 입지를 굳건히 해야 한다.


과학의 시각을 재고하고 과학을 이용하는 인간에 도덕적인 덕목이 우선시된다면, 과학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바람직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사람과의 정직성과 솔직함이 사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부추기고,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올바른 과학문화를 양성함으로써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Posted by Elegant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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